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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에 기록된 '이순신의 발탁'

by Jay Jang 2025. 5. 19.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읽다가 유성룡의 '이순신 발탁과 활약' 부분을 적어 보았습니다. 

 

1. 이순신의 발탁

 

  정읍현감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수사로 삼았다.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그는 일찌기 조산만호가 되었는데, 이 때 북쪽 변방에는 사변이 많았다. 이순신은 좋은 계략으로 오랑캐 우을기내를 유인하여 와서 병영으로 묶어 보내어 베어 죽이니, 드디어 오랑캐의 근심이 없어졌다. 

 

 순찰사 정언신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녹둔도의 둔전을 지키게 하였다. 하루는 안개가 심하게 끼었는데, 군인들은 다 벼를 거두러 나가고 목책안에는 다만 군인 10여 명 만이 있었다. 그런데 오랑캐의 기병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이순신은 목책의 문을닫고서 스스로 유영전(화살촉이 버들입처럼 생긴 화살)을 목책 안에서 연달아 쏘아, 적 수십명이 말에서 떨어져 죽으니 오랑캐들은 크게 놀라서 도망하였다.  

 

 이순신은 문을 열고 혼자서 말을 타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쫒아가니 오랑캐들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약탈된 재물을 다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조정에서 그를 추천하여 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조록 승진이 되지 못하다가 비로서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 때 왜적이 펴들어 온다는 소리가 날로 심하게 전해지자, 임금께서는 비변사에 명하여 각각 장수감이 될 사람을 추천하라 하므로, 내가 이순신을 추천하여 드디어 정읍현감에서 수사로 명하니, 사람들은 그가 갑작스레 승진한 것을 의아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2.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왜적을 격파하다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적병을 거제도 바다 한 가운데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보다 먼저 왜적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올라왔을 때 원균은 왜적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감히 나가서 치지 못하고, 전선 1백여 척과 화포, 군기를 바다속에 침몰시켜 버린 다음, 수하의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과 함께 네 척의 배를 타고 달아나 곤양의 바다 어귀에 이르러 육지로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군 1만여 명이 다 무너져 버렸다. 

 

 이영남이 말하기를, "공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지금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내려간다면 뒷날 조정에서 죄를 조사할 때 무슨 이유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그보다는 구원병을 전라도에 청하여 왜적과 한 번 싸워보고, 이기지 못하겠으면 그 연후에 도망하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하니 원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여,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각각 분담한 한계가 있으니, 조정의 명령이 아니면 어찌 함부로 경졔를 넘어갈 수 있으리오?"하며 거절하였다. 원균은 이영남을 보내어 무릇 대여섯 차례나 청하게 하였는데, 이영남이 돌아갈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얼마 뒤에 이순신은 판옥선 40척을 거느리고 아울러 약속한 이억기와 함께 거제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원균과 함께 군사를 합세하여 나아가 왜적의 배와 견내량에서 만났다. 이순신은 말하기를, "이곳은 바다가 좁고 얕아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어려우니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하며 적을 유인하여 넓은 바다로 나가서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원균이 분함을 못이겨 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싸우려고 덤볐다.

 

 그러자 이순신은 "공은 병법을 모릅니다그려. 그렇게 하다가는 반드시 패하고 맙니다."락도 말하고는 깃발을 가지고 배들을 지휘하여 물러나니, 왜적들은 크게 기뻐하며 서로 앞을 다투어 따라 나왔다. 배가 좁은 어귀를 다 벗어나왔을 때 이순신이 북소리를 한 번 울리니, 모든 배들이 일제히 노를 돌려저어 바다 한 가운데 열지어 별여 서서 바로 적선과 맞부딪치니 서로의 거리는 수십 보 가량 떨여져 있었다.

 

  이보다 먼저 이순신은 거북선을 창조하였다. 이 배는 널판자로 배 위를 덮어 그 모양이 활처럼 가운데가 높고 주위가 차츰 낮아져서 거북과 같았고, 싸우는 군사들과 노잣는 사람들은 다 그 안에서 활동하고, 왼쪽, 오른쪽, 앞, 뒤에는 화포를 많아 싣고 말음대로 이리 저리 드나드는 것이 마치 배짜는 북 드나들 듯 하였다.

 

 이순신은 적선을 만나자 대포를 쏘아 이들을 쳐부수고 여러 배들이 합세하여 한꺼번에 공격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였고, 적선을 불태운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때 적장은 누선을 타고 있었는데, 그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높은 망대가 있어 뷹은 비단과 채색 담요로 그 밖을 둘러쌌었다. 이 배도 우리 대포에 맞아 부서져 버리고 배에 탔던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 뒤에도 왜적들은 싸움마다 연달아 다 패하여, 드디어는 부산, 거제로 도망쳐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나라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확보할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도 보전할 수가 있었다. 또 군량으 조달하고 호령을 전달할 수가 있어서 나라의 중흥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이순신은 이로 인하여 삼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주둔하여, 왜적이 서쪽으로 침범하려는 길을 막았다.

 

징비록
징비록

 

 

 3. 결  (류성룡이 평가한 이순신의 인품)

 

  이순신의 자는 여해, 본관은 덕수다. 그의 선조에 이변이라는 이는 벼슬이 판부사에 이르렀는더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증조인 이거는 성종을 섬겼는데, 연산이 동궁으로 있을 때 강관이 되어 너무 엄격하여 꺼림을 당하였다. 그가 일찌기 장령이 되었을 때에 탄핵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으니 만조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은 가문의 덕으로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이정은 벼슬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어렸을 때 영특하고 활달하였다. 그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도 나무를 깎아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가지고 거리에서 놀았는데, 마음에 거스리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 군문 앞을 막 지나가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자라서는 활을 잘 쏘았으므로 무과를 거쳐서 출세하였다. 이씨의 조상은 대대로 유교를 숭상하여 문관을 지냈는데, 이순신에 이르러서  비로서 무과에 올라서 권지훈련원 봉사(종8품)에 보직되었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아하여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